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온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오히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낳고, 수행을 완료해야 할 숙제로 만들어버립니다. 깨달음이란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반복하며 순환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이 글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벗기고, 수행의 진정한 의미를 재조명합니다.
마음 정화는 완료되지 않는 일상의 과정입니다
마음 정화를 대청소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몇십 년간 청소하지 않은 집이 더러워 병이 날 지경이 되면, 우리는 대청소를 시작합니다. 묵은 때를 청소하는 과정은 오래 걸리고 힘들지만, 청소를 해낼수록 집이 깨끗해지고 몸도 건강해집니다. 마음 정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억눌려 있던 많은 양의 감정을 토해내는 과정은 괴롭지만, 감정을 풀어낼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 청소가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대청소로 깨끗해지고 병이 나아도, 일주일 지나면 집에 다시 먼지가 낍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정화를 하여 마음이 예전보다 건강해지고 현실도 편안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마음에 다시 먼지가 낄 수 있습니다. 다시 괴로움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정화를 하면 괴로움 없이 편하게 살 수 있게 되겠지"라는 기대는 "집 대청소 한 번 하고 나면 다시는 집이 더러워질 일이 없겠지" 또는 "운동해서 건강해지면 다시는 운동할 필요가 없겠지"라고 여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열심히 힘들게 운동해서 건강해진다고 해도 그 상태가 절대 완료 정지된 채로 있지 않습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전보다 앎이 일어나고 마음이 건강해진다 하더라도 그 상태가 완료 정지된 채로만 있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사는 동안은 몸을 가졌으니 운동을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으로 사는 동안은 마음을 가졌으니 마음 운동 역시도 꾸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이란 괴로움이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썰물이었다가 밀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낮이었다가 밤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것을 낮과 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견디는 마음 근육이 진짜 목표입니다
수행을 통해 변화되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 아니라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입니다. 몸도 운동을 할수록 건강해지듯이 마음도 운동을 할수록 건강해지게 됩니다. 운동을 안 하고 살면 병이 나지만 운동을 하고 살면 면역력과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의 병을 쉽게 이겨내게 되고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10kg도 힘들게 들겠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100kg을 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100kg을 들 수 있게 되면 10kg은 가볍게 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무리 운동 경력자라도 운동할 때는 똑같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100kg을 들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지 아무런 고통 없이 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 정화를 해나가다 보면 예전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게 되다 보니 괴로움이 커지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즉, 수행하고 산다고 해서 괴로움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안 힘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운동 초보나 경력자나 무게를 들 때는 똑같이 괴롭습니다. 다만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10kg의 감정을 보는 게 너무 힘들겠지만 마음 운동을 해나가다 보면 100kg 강도의 감정을 덜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큰 파도가 칠 때 마음 근육이 없다면 파도를 무서워서 피하려다가 파도에 그대로 빠져서 허우적대겠지만, 마음 근육을 키워 놓는다면 파도에 몸을 싣고 파도에 따라 서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100kg을 들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겠냐"는 설명은, 수행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의 축적 과정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행을 시작한 이들에게 "결국 더 큰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결론은 자칫 수행의 목적지를 상실하게 하거나, 끝없는 고행의 정당화로 읽힐 위험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과 상대적 현실이 괴로움을 지속시킵니다
마음 정화를 하고 살아도 괴로움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집단 무의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집단 무의식이 붙들고 있는 카르마 역시 개인에게 적용되어서, 집단이 붙들고 있는 두려운 감정이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남극에 혼자 덩그러니 집 한 채 딸랑 있는 곳에서 창문을 다 닫고 아무랑도 소통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족과 학교, 사회라는 집단에 소속되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도 하고, 인터넷도 합니다. 전 세계가 연결된 글로벌 시대에 북적북적한 곳에 다 같이 집을 짓고 창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당연히 우리 집에 먼지가 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족의 무의식,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 한국인 전체의 무의식, 내 직계 조상이 붙들고 있는 무의식, 과거 한국 조상 전체가 붙들고 있는 의식, 지구인 전체의 무의식, 지구 역사 속 모든 것에 대한 무의식 등 집단 무의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개체 같지만 무의식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나뭇잎 하나와 나무 전체가 별개가 아니듯이요. 내가 아무리 수행을 하고 산다 하더라도 집단, 전생, 조상 등에 가졌던 카르마에 따라 어떤 현상을 문제로 인식하게 되거나 괴로움을 겪는 일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현실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현실에서는 한쪽만 계속적으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깨달음만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있어야만 사랑이 인식됩니다. 사랑을 인식하고 나면 사랑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서 다시 두려움을 겪어야만 사랑이 인식됩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진정한 평온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평온을 체험하고 나면 다시 평온을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엄청 추운 날 따뜻한 온천탕에 들어가면 처음엔 너무 따뜻하고 좋은데 탕 안에 계속 있다 보면 처음 느꼈던 그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평온을 의식하고 나면 평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온하지 못한 상태를 겪어야만 평온을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상대계에서는 한쪽을 겪고 다른 한쪽을 인식하고 다시 한쪽을 겪고 다른 한쪽을 인식하는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세 번째 이유는 괴로움이 마음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운동 경력자라도 운동할 때 괴로워야만 근육이 유지되듯이 마음 근육도 괴로움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괴롭지 않다면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겠지만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 보니 근육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의 근육을 갖게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짊어진 마음의 무게를 들어줄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인류는, 특히 한국은, 과거에 쌓였던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는 집단적으로 억압됐던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되는데, 마음의 근육을 키워 놓은 사람은 어떤 방식이 됐든, 어떤 직업이 됐든, 어떤 활동을 통해서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환상은 오히려 수행을 숙제처럼 느끼게 하고, 타인을 깨달은 자와 못 깨달은 자로 나누는 새로운 분별심을 낳습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은 둘이 아니며, 우리는 하루에 수도 없이 참나로 깨달았다가도 에고로 깨닫지 못했다가를 반복합니다. 수행의 진정한 가치는 괴로움의 소멸이 아니라, 괴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괴로움까지 함께 짊어질 수 있는 마음 근육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끝없는 고행의 정당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수행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성찰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본 포스팅은 유튜브 '나탐 Natam'의 '깨달으면 정말 괴롭지 않고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를 시청하며 중요하다고 느낀 포인트들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